작성일 : 13-10-17 2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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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손지애 (180.♡.23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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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세기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쇄신을 요구하며 등장했던 개혁운동이다.
이를 통해 오늘날 프로테스탄트라 부르는 교파가 생겼다. 이 운동은 광범위하게 벌어졌는데, 특히 17,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퓨리터니즘도 넓은 의미로는 이 운동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비뇽 교황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 결과, 14세기경부터 그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공의회(公議會) 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어 피사·콘스탄츠·바젤 등지에서 공의회가 열렸으나,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무위로 끝났다.
한편, 프랑스·영국 등 유럽 각국은 근대 국민국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중세적 그리스도교 세력은 점차 쇠퇴해 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종교개혁은, 교회의 혁신운동이지만 근대국가의 성립이라는 정치적 변혁과 밀접한 함수관계에 있었다.
본격적인 종교개혁은 M.루터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나 루터 이전에도 개혁의 선구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민중 사이에서 성서적 신앙을 인도한 프랑스의 발도, 롤러드파(派)를 이끌던 영국의 위클리프,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후스, 윤리적 쇄신을 시도하였다가 끝내 순교한 피렌체의 사보나롤라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즉,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이어서 참으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하였다. 이와는 달리 종교개혁운동은 깊이 민중의 마음을 포착하여 역사를 움직였다. 마찬가지로 근대의 서곡이라 할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과는 그 출발점과 역사상 미친 영향면에서 볼 때 근본적으로 다르다.
[종교 개혁의 역사]
연도
사건
1483
루터, 아이스베른에서 태어남
1484
츠빙글리 탄생
1509
칼뱅 태어남
1513
루터 '하느님의 뜻' 발견
1517
루터, <95 개조 의견서> 내놓음
1519
루터, 라이프치히에서 에크와 논쟁
1520
루터에 대한 파문협박장 공포
1521
루터에 대한 정식 파문장 공포.
4월 루터, 보름스 제국의회에 출두하고, 귀로에 바르트부르크 성에 보호되다. 소르본 대학 신학부, 루터를 이단(異端)으로 단정, 이어 르페브르의 저서에서도 똑같은 선고를 함.
1522
루터, 신약성서의 독일 번역판 출판
1523
츠빙글리, 취리히에서 개혁운동을 개시.
취리히 토론 열림
1524
독일, 농민전쟁 시작됨
1525
루터 결혼. 에라스무스와의 <자유 의지> 논쟁. 모에서 프랑스의 개혁운동단체에 탄압.
1526
제1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개최
1529
제2차 슈파이어 제국의회 개최. 이 때부터 '프로테스탄트'란 명칭이 쓰이기 시작함. 성찬문제에 관해서 루터와 츠빙글리 마르부르크에서 회담함
1530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 개최.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이 작성되어 루터파의 기본 신조가 되다. 그러나 로마 교회와의 타협 실패
1531
슈말칼덴 동맹 결성. 츠빙글리 전사함
1534
헨리 8세. '성직자 임명법' 및 '수장령(首長令)'을 공포하여 영국 교회를 로마 교회로부터 결정적으로 분리시킴
1535
퀸스터에서 재침례파(再浸禮派) 괴멸
1536
칼뱅, 《그리스도교 강요(綱要)》를 출판, 파렐의 요청으로 제네바의 개혁운동에 참가
1538
반대파의 책동으로 제네바의 개혁운동은 일시 좌절되고 파렐은 뉴샤테르로, 칼뱅은 스트라스부르에 감
1540
칼뱅, 또다시 제네바에 귀환
1545
트리엔트 공의회 개시됨(1563년까지)
1546
루터 죽음
1572
성(聖) 바르톨로뮤의 학살
1620
메이 플라워호(號)에 의한 필그림(청교도의 일파)의 신대륙 이주
1640
청교도혁명 개시됨
출처;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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